시 한편 7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 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 ​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머지않아 열매 맺는가을을 향하여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 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 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  *1957년

시 한편 2024.09.24

보고 싶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김대규 님의 "보고 싶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 기억이 떠 올라 희미하게 그려지는 얼굴이라도 내 생애 끝나는 날까지 단 한번이라도 보고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잊은지 오래지만 그래도 살아가노라면 영상처럼 떠 오르는 내 곁에서 맴도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발자국 자국마다 새겨지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 어두운 창가에 몸을 내밀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로 그대 음성 들으려합니다. 그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잊혀질만 하면 떠 오르는 한 사람 마치 끊어지지 않는 밧줄처럼 영원히 사랑해야 될 한 사람인데 떠나버린 그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 내가 여기 우뚝 서 있습니다. 살아 가노라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 두 눈이 멀어지는 고통속에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하는 그런 한 사람이 있습..

시 한편 2023.06.13

꽃 피는 봄엔 - 용혜원

봄이 와 온 산천에 꽃이 신나도록 필 때면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겨우내 얼었던 가슴을 따뜻한 바람으로 녹이고 겨우내 목말랐던 입술을 촉촉한 이슬비로 적셔 주리니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온몸에 생기가 나고 눈빛마저 촉촉해지니 꽃이 피는 봄엔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봄이 와 온 산천에 꽃이 피어 님에게 바치라 향기를 날리는데 아! 이 봄에 사랑하는 님이 없다면 어이하리 꽃이 피는 봄엔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시 한편 2022.03.24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에게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 곁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의 탄생 비하가 있군요.. "낭송..

시 한편 2022.03.18

사모 -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시 한편 2022.03.18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

시 한편 2022.03.18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 한편 2022.03.18